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쇼다 사건 (문단 편집) === [[프랑스 제3공화국|프랑스]] === [[프랑스령 인도차이나|인도차이나 반도]]와 [[누벨칼레도니|남태]][[프랑스령 폴리네시아|평양]] [[바누아투|일대]]에 존재하던 그들의 식민지로 진출하는 빠른 항로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. 그래서 프랑스는 홍해 인근을 노리던 영국과 [[이탈리아 왕국|이탈리아]][* 현재의 [[소말리아]]와 [[에리트레아]] 지역을 식민지화했다.]를 견제하기 위해 [[다카르]] & [[브라자빌]] - [[서아프리카]] & [[중앙아프리카]] - 수단 - [[에티오피아]] - 프랑스령 소말릴란드(현재의 [[지부티]])를 잇는 지역을 장악하려고 했다.[* [[마다가스카르]]와 [[코모로]]가 비슷한 시기에 식민화되어 이것까지 고려한 횡단 정책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마다가스카르나 코모로는 따로 뚝 떨어져 있는 섬이기 때문에 지정학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.] 1893~1895년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공고히 한 프랑스는 동진을 계속했다. 프랑스의 외무장관 가브리엘 아노토(Gabriel Hanotau)는 1896년 프랑스 육군 [[대령]] 장 바티스트 마르샹이 이끌던 1개 중대급 원정대를[* 원정대원 12명, 경비대 120명으로 총 132명.] 동쪽으로 파견하였다. 마르샹 원정대가 파쇼다에 도착하면 [[지부티]]에서 원정대를 파견하고 파쇼다에서 조우함으로써 횡단 정책을 완성하겠다는 의도였다. 마르샹 원정대는 브라자빌을 출발하여 콩고 강과 우방기 강을 거슬러 올라간 뒤 중앙아프리카의 정글과 수단의 사막을 헤쳐나가는 14개월의 원정 끝에 1898년 7월 10일 남수단 파쇼다에 도착해 프랑스 [[국기]]를 내걸었다. 하지만 지부티에서 출발한 원정대는 현지 주민의 적대적 태도에 당초 원정을 위한 통로 이용을 허가한 [[에티오피아]] 황제 메넬리크 2세가 원정을 중단할 것을 통보하면서 1897년 실패로 돌아갔고 파쇼다에 도착한 것은 먀르샹의 원정대뿐이었다. 마르샹의 원정대 홀로 파쇼다에서 버티는 상황 속에 키치너가 이끄는 영국 원정군이 [[9월 18일]] 파쇼다에 들이닥치면서 파쇼다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게 되었다. 열 배가 넘는 1,500명의 병력에 [[영국 해군]]의 [[포함]]까지 거느린 영국 원정군의 우세가 명백한 상황에 양측 지휘관은 본국의 명령을 기다리기로 합의하고 충돌 없이 동시 주둔에 들어갔다. 파쇼다에는 [[유니언 잭|영국 국기]]와 프랑스 국기, 그리고 명목상 수단의 지배국인 이집트 국기가 일단 함께 내걸렸다. 이런 갈등 소식이 본국에 날아들자 가뜩이나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불붙었던 양국 국민의 여론은 급격히 나빠졌고 양국은 [[함대]]까지 준비하는 상황에 몰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